종교개혁

최고관리자 0 2,652 2017.10.23 12:30
종교 개혁—하나님을 찾으려는 노력의 새로운 전기

 

“중세 교회의 진정한 비극은 시대의 추세에 맞추어 나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 교회는 진보해 나아가고 영적 지도를 베풀기는커녕, 퇴보하고 쇠퇴하고 속속들이 부패하였다.” 「종교 개혁 이야기」(The Story of the Reformation) 책은 기원 5세기부터 15세기까지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강력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 그와 같이 알려 줍니다.

 

로마 교회는 어떻게 만능의 지위에서 떨어져 ‘쇠퇴하고 부패한’ 상태가 되었습니까? 사도 계승을 주장하던 교황들이 어떻게 “영적 지도”마저 베풀지 못하였습니까? 그리고 이런 실패가 초래한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로마 교회가 도대체 어떤 종류의 교회였고 참 하나님을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퇴조

 

15세기 말엽, 로마 교회는 그 영역 전체에 걸쳐 본당(本堂)·수도원·수녀원 등을 두고서, 유럽 전체를 통틀어 최대의 지주가 되었습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교회는 프랑스와 독일의 절반 그리고 스웨덴과 영국(잉글랜드)의 5분의 2 이상에 달하는 토지를 소유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1400년대 말과 1500년대 초에 걸쳐서 로마 교회의 영화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커졌으며 그 정치적 중요성도 일시적으로 크게 확대되었다”고 「문명의 역사」(A History of Civilization) 책은 알려 줍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장엄함을 누리는 데는 비용이 들었으며, 교황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새로운 수입원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사용된 여러 가지 방법을 묘사하여, 역사가 윌 듀랜트는 이렇게 썼습니다.

 

“교직자로 임명받은 사람은 누구나 교황청—교황을 보필하는 행정 사무소—에 자기 직무로 얻은 첫 해 수입의 절반(“교회록 취득 헌금”)을, 그후로는 해마다 10분의 1 곧 십일조를 바쳐야 했다. 새로 임명받은 대주교는 팔리움—대주교의 권위를 확증하는 표장으로 사용하는 흰색 양털 띠—을 받기 위해 교황에게 상당한 금액을 바쳐야 했다. 추기경·대주교·주교·대수도원장 등이 사망하면, 그의 사유 재산은 교황에게 귀속되었다. ··· 교황청으로부터 무슨 판결이나 은총을 받으면 그때마다 으레 답례의 선물을 바쳐야 했으며, 때로는 선물에 따라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해마다 교황의 금고 속으로 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돈으로 인해 마침내 큰 악폐와 타락이 초래되었습니다. ‘아무리 교황이라도 손가락을 더럽히지 않고 진흙을 만질 수는 없다’는 말이 돌기도 했습니다. 그 시대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한 역사가가 말한 대로 “매우 속된 교황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식스투스 4세(교황 재위 1471-84년)가 포함되었는데, 그는 자기 이름을 따서 시스티나 성당을 건축하고 여러 명의 조카와 조카딸을 부자로 만들기 위해 막대한 돈을 썼습니다.

 

알렉산더 6세(교황 재위 1492-1503년) 곧 악명 높은 로드리고 보르기아는 자기에게 사생자가 여럿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그들을 후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식스투스 4세의 조카인 율리우스 2세(교황 재위 1503-13년)는 교직자로서의 의무보다 전쟁과 정치와 예술에 더 몰두했습니다. 아주 당연하게도, 1518년에 네덜란드의 가톨릭 학자 에라스무스는 “로마 교황청의 뻔뻔스러움이 그 절정에 달하였다”고 썼습니다.

 

타락과 부도덕은 교황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흔히 사용되던 말로, “아들을 망치고 싶으면 사제를 만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기록은 그 말의 참됨을 뒷받침합니다.

 

듀랜트에 의하면, 영국에서 “인구 중 교직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아마 2퍼센트 미만이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1499년에 음란 행위에 대한 고발 기록 [가운데] ··· 범죄자가 교직자인 경우는 전체의 약 23퍼센트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일부 고해 사제들은 여성 고해자들을 성적으로 유혹하기도 했”습니다. “수천 명의 사제가 첩을 두었으며, 독일에서는 거의 모든 사제가 그러했”습니다. (대조 고린도 전 6:9-11; 에베소 5:5.) 도덕적 타락은 다른 부면들로도 번졌습니다.

 

당시의 한 스페인인은 이렇게 불평했다고 합니다. “내가 알기로는 돈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교직자들로부터 거의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세례받을 때도 돈, ··· 결혼할 때도 돈, 고해할 때도 돈—심지어 돈이 없으면 종부 성사[임종 의식]도 못 받는다! 돈을 받지 않으면 교회 종도 치지 않을 것이며, 돈을 받지 않으면 교회에 매장해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돈 없는 사람은 낙원에도 못 들어갈 것 같다.”—대조 디모데 전 6:10.

 

16세기초 로마 교회의 상태를 요약하기 위해, 그 당시 이탈리아의 유명한 철학자 마키아벨리의 말을 인용해 봅니다.

 

“그리스도교가 그 창시자의 명령대로 보존되었더라면, 그리스도교국의 국가와 연합체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연합되고 행복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믿는 종교의 우두머리격인 로마 교회에 더 가까운 사람일수록 종교심이 더 적다는 사실보다 그 퇴폐상을 더 잘 나타내는 증거는 없을 것이다.”

 

개혁을 위한 초기의 노력

 

에라스무스나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자체에서도 교회 내의 위기를 인식하였습니다. 얼마의 불평과 악폐를 거론하기 위해 교회 공의회들이 열렸지만 지속적인 효과는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권력과 영광을 누리던 교황들은 개혁을 위한 실질적 노력을 도무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더 진지하게 자체 정화를 했더라면, 종교 개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개혁을 부르짖는 외침은 사실상 교회 안팎에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발도파(발두스파)와 알비파가 있었고 그들은 비록 이단자들로 단죄받고 가혹하게 억압당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톨릭 교직자의 악폐에 대한 불만을 일깨우고 성서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런 감정은 많은 수의 초기 종교 개혁가들에 의해 표현되었습니다.

 

교회 내부로부터의 항의

 

흔히 “종교 개혁의 샛별”로 불리는 존 위클리프(1330?-84년)는 가톨릭 사제이자 영국 옥스퍼드의 신학 교수였습니다. 교회의 악폐를 잘 알고 있던 위클리프는 수도회 내의 타락, 교황의 세금 징수, 성변화(聖變化) 교리(미사에서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가 문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주장), 고해, 교회의 세속일 관여 등을 반박하는 글을 쓰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위클리프는 특히 교회가 성서를 가르치는 일을 태만히 하는 것에 대해 기탄없이 말하였습니다. 한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나라의 본당 교회마다 좋은 성서를 가지고 복음에 대해 좋은 해설을 하며 사제들이 그것을 잘 연구하여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복음과 하나님의 명령을 가르친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이런 목적을 위해서, 위클리프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라틴어 불가타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동료들 특히 헤리퍼드의 니콜러스의 도움으로, 그는 최초의 영어 완역 성서를 발행하였습니다. 의문의 여지 없이, 그 일은 하나님을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에 있어서 위클리프가 공헌한 것 중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위클리프의 저술물과 성서 부분들은 흔히 “가난한 사제들”로 불린 일단의 전파자들에 의해 영국 전역에 배포되었습니다. 그런 이름으로 불린 이유는 그들이 간단한 옷에 맨발로, 아무 물질적 소유물도 없이 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조롱조로 롤러드파로도 불렸는데, 그 이름은 “기도문이나 찬송가를 중얼거리는 사람”을 뜻하는 중세 네덜란드어 단어 롤라르트에서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브루어 관용구 우화 사전」[Brewer’s Dictionary of Phrase and Fable]) 「롤러드파」(The Lollards) 책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불과 몇 년 만에 그들의 수는 상당히 많아졌다. 적어도 국민의 4분의 1은 실제적으로든 명목상으로든 그들의 생각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추산된다.”

 

물론, 이 모든 일이 교회의 주목을 받지 않고 이루어질 수는 없었습니다. 위클리프는 지배층과 학자층 사이에서 명망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1384년의 마지막 날에 평화스럽게 임종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의 경우는 그만큼 순탄한 편이 못 되었습니다. 영국 왕 헨리 4세의 통치중에, 그들은 이단자로 낙인찍혀 많은 사람이 투옥되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존 위클리프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으로, 역시 가톨릭 사제이자 프라하 대학교 총장이었던 보헤미아(체코)의 요하네스 후스(1369?-1415년)가 있었습니다. 위클리프처럼, 후스도 로마 교회의 타락을 반박하는 설교를 하고 성서를 읽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즉시 교직자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1403년에, 당국자들은 그에게 교황을 반대하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전파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위클리프의 책들을 공개적으로 불사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스는 계속해서 면죄부 판매를 포함한 교회의 행위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비난하는 얼마의 글을 썼습니다. 그는 1410년에 단죄를 받고 파문당하였습니다.

 

후스는 성서를 지지하는 면에서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후스는 “불의한 교황에게 반역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또한 참 교회는 교황과 기성 로마 교회가 아니라, “택함받은 자들 전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분의 신비한 몸,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크신 사랑 때문에 자신의 피로 구속하신 그분의 신부”라고 가르쳤습니다. (비교 에베소 1:22, 23; 5:25-27.)

 

이 모든 일로 인해,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재판을 받고 이단자로 단죄받았습니다. 후스는 “그릇되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선언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기를 거절하고 1415년에 기둥에 달려 화형당했습니다. 또한 같은 공의회에서는, 이미 30여 년 전에 사망하여 매장된 위클리프의 유골까지 파내서 불태울 것을 명령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초기 종교 개혁가는 이탈리아, 피렌체(플로렌스)의 산마르코 수도원 소속, 도미니크회 수도승인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98년)였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신에 감화된 사보나롤라는 교회와 국가의 타락을 비난하였습니다.

 

사보나롤라는 자기의 생각이 성경뿐 아니라 그가 받았다는 환상과 계시에 근거한 것임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교 국가 혹은 신권 질서를 설립하려고 노력했습니다. 1497년에 교황은 그를 파문하였습니다. 이듬해, 그는 체포되었고 고문을 당한 다음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사보나롤라의 마지막 말은 “내 주께서 내 죄를 위해 죽으셨는데, 보잘것없는 이 생명 하나 그분을 위해 기꺼이 바치지 못하겠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시체는 불태워졌고 유골은 아르노 강에 뿌려졌습니다. 적절하게도, 사보나롤라는 자신을 “선구자요 희생 제물”이라고 불렀습니다. 불과 몇 년 후에, 종교 개혁은 유럽 전역에서 기세 등등하게 일어났습니다.

 

분열된 집

 

마침내 종교 개혁의 폭풍이 일어났을 때, 그 폭풍은 서유럽에서 그리스도교국이라는 종교의 집을 부서뜨렸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거의 전적으로 지배하던 집이 이제는 분열된 집이 되었습니다. 남부 유럽—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프랑스의 일부—은 대부분 가톨릭교로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나머지 지역은 세 주요 분파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는데, 그 세 분파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루터파, 스위스·네덜란드·스코틀랜드·프랑스 일부의 칼뱅(칼빈)파 (혹은 개혁파), 그리고 영국의 성공회였습니다.

 

그 분파들 가운데 흩어져 있는 소수파지만 더 급진적인 그룹들로 처음 등장한 것이 재세례파였으며, 그후에 등장한 것이 메노파·후터파·청교도였습니다. 이들은 얼마 후에 자기들의 신앙을 가지고 북아메리카로 건너갔습니다.

 

이 주요 분파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 분열되어, 오늘날에는 수백 가지 교파를 이루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 장로 교회·감독 교회·감리 교회·침례 교회·조합 교회 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국은 참으로 분열된 집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분열이 생기게 되었습니까?

 

루터와 그의 명제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결정적 출발점을 굳이 지적해야 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승 마르틴 루터(1483-1546년)가 독일 작센 주, 비텐베르크의 성곽 교회 문에 95개 조 명제를 붙였을 때인 1517년 10월 31일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마르틴 루터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리고 그는 무엇에 대해 항의하였습니까?

 

마르틴 루터도 그 이전의 위클리프나 후스처럼 수도승이자 학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신학 박사이자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성서 연구 교수였습니다. 루터는 성서에 대한 통찰력으로 상당한 명성을 떨쳤습니다. 루터는 행함이나 고해에 의한 것이 아닌 믿음에 의한 구원 혹은 의화(義化) 문제에 대해서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로마 교회와 결별하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사실, 루터가 그의 명제를 발표한 것은 특정 사건에 대한 태도 표명이었지, 계획된 반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면죄부 판매에 대해 항의했던 것입니다.

 

루터 당시에는 산 사람들뿐 아니라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공공연히 교황의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돈궤에 주화가 떨어지면서 딸그랑 소리를 내는 순간, 연옥에서 영혼이 빠져 나온다”는 말이 흔히 나돌았습니다. 면죄부는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슨 죄를 짓더라도 벌을 면하게 하는 보증서가 되다시피하였고 회개는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어디서나 연옥의 고통을 면제해 주는 사면장을 팔고 있다. 단지 팔 뿐만 아니라 거절하는 사람에게까지 억지로 사도록 강요하고 있다.”

 

1517년에 도미니크회 수사, 요한 테첼이 비텐베르크 근방의 위터보크로 가서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의 일부는 로마의 성 베드로 바실리카 재건 사업을 재정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일부는 브란덴부르크 가문의 알베르트가 마인츠 대주교 직책을 얻기 위해 로마 교황청에 바치느라 빌린 돈을 갚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테첼은 판매 수완을 십분 발휘했고, 사람들은 그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분노한 루터는 가능한 가장 신속한 수단—95개 항목의 반론을 적어 교회 문에 붙이는 것—을 사용하여, 완전히 광대 놀이 같은 그 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공개 발표하였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95개 조 명제를 「면죄부의 효력을 규명하기 위한 반박」(Disputation for Clarification of the Power of In-dulgences)이라고 불렀습니다. 루터의 목적은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황 면죄부 판매와 관련된 지나친 행동과 악폐를 지적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의 명제들을 볼 때 그 점을 알 수 있습니다.

 

“5. 교황은 그 자신의 권위로 부과한 형벌 외에 그 어떤 형벌도 사면할 의도나 권능을 지니고 있지 않다. ···

 

20. 그러므로 교황이 모든 형벌의 무조건 사면에 관해 말할 때, 그것은 실제로 모든 형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부과한 형벌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

 

36. 진정으로 통회하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사면서가 없더라도 정당하게 형벌과 죄의 무조건 사면을 받는다.”

 

얼마 전에 발명된 인쇄기의 도움으로, 폭발성을 지닌 이 사상은 오래지 않아 독일의 다른 지역으로—그리고 로마로—퍼져 나갔습니다. 면죄부 판매에 대한 학술 토론으로 시작했던 것이 어느새 믿음과 교황의 권위 문제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처음에, 로마 교회는 루터와 토론을 벌이면서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루터가 거절하자, 교회 권력과 정치 권력이 모두 그에게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1520년에 교황은 대칙서를 발표하여 루터의 설교를 금지시키고 그의 책들을 불태우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루터는 이를 무시하고 교황의 대칙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웠습니다. 교황은 1521년에 그를 파문하였습니다.

 

그후 루터는 같은 해에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 의회 곧 국회에 소환되었습니다. 루터는 철저한 가톨릭교인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그리고 여섯 명의 독일 선제후(選帝侯)와 그 밖의 종교 및 세속 지도자들과 고위 관리들 앞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또다시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압력을 받자, 루터는 이와 같은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의해 확신하게 되지 않는 한, ··· 나는 그 어느 것도 철회할 수 없으며 철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양심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은 옳지도 안전하지도 못한 일입니다. 하나님, 도와 주십시오. 아멘.”

 

그 결과, 루터는 황제에 의해 법적 권리를 박탈당한 자로 공표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루터 자신이 속한 독일 영방(領邦) 국가의 통치자인,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그에게 도움을 베풀어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도 루터의 사상이 퍼져 나가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바르트부르크에 은신해 있던 10개월 동안, 루터는 저술과 성서 번역에 전념했습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희랍어 본문을 근거로 희랍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다음에는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루터의 성서는 바로 평민들이 필요로 하던 것이었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두 달 만에 5천 권이 팔리고, 12년 동안에 20만 권이 팔렸다”고 합니다. 루터의 성서가 독일어와 독일 문화에 미친 영향은 흔히 「제임스 왕역」(King James Version)이 영어에 미친 영향과 비교됩니다.

 

보름스 제국 의회가 열리고 나서 몇 해 동안, 종교 개혁 운동이 큰 대중적 지지를 얻게 되자, 황제는 1526년에 각 독일 영방 국가에 루터교든 로마 가톨릭교든 그 나름의 종교를 선택할 권리를 부여하였습니다. 그러나 1529년에 황제가 결정을 번복하자, 독일의 일부 제후들이 항의(프로테스트)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 운동에 대해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530년, 황제는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 양측의 의견 차이를 조정해 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루터교인은 그들의 신앙을 적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이라는 문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 문서는 필리프 멜란히톤이 작성하였지만 루터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 문서는 매우 회유적인 어조를 띠었지만, 로마 교회는 이를 묵살하였고, 그로 인해 프로테스탄트교와 가톨릭교 사이의 균열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많은 독일 영방 국가가 루터의 편을 들었고, 스칸디나비아 영방 국가들도 곧 그 뒤를 따랐습니다.

 

개혁인가, 반역인가?

 

프로테스탄트교와 로마 가톨릭교를 갈라놓은 근본적 차이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루터에 의하면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루터는 구원이 “오직 믿음에 의한 의화”(라틴어, 솔라 피데)를 통해서 오는 것이지 사제에 의한 사죄(赦罪)나 고해 행위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둘째로, 루터는 용서를 받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솔라 그라티아)에 의한 것이지 사제나 교황의 권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마지막으로, 루터는 모든 교리 문제가 오직 성경(솔라 스크립투라)에 의해 확증되는 것이지 교황이나 교회 공의회에 의해 확증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렇게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옛날부터 내려온 신앙과 전례의 많은 부분을, 죄와 의화에 대한 자기 특유의 견해에 맞출 수 있는 한, 그대로 유지하였다”고 「가톨릭 백과 사전」(The Catholic Encyclopedia)은 알려 줍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은 루터교의 믿음에 관해 기술하기를, “성경이나 가톨릭 교회 혹은 더 나아가 로마 교회와도—필자들을 통해 알려진 바대로라면—아무런 불일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 요약된 루터교의 믿음에는 삼위일체, 영혼불멸, 영원한 고초 같은 비성경적 교리들 그리고 유아 세례와 교회의 성일(聖日) 및 축일 같은 관습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루터교인은 사람들이 영성체 때 포도주와 떡을 둘 다 받도록 허락해야 한다든가 독신제, 수도승의 서원, 의무적 고해 등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 같은 몇 가지 면에서 변화를 주장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이 주창한 종교 개혁은 교황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요한 복음 4:24(신세)에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숭배해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로 인해 참 하나님을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진리의 좁은 길과는 아직도 거리가 멀었습니다.—마태 7:13, 14; 요한 8:31, 32.

 

스위스에서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

 

루터가 교황 특사 및 독일 세속 당국자들과 한창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가톨릭 사제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년)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그의 개혁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지역은 독일어 사용권으로, 사람들은 이미 북쪽에서 밀려오는 개혁 물결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1519년경, 츠빙글리는 면죄부, 마리아 숭배, 교직자의 독신제 및 그 밖의 가톨릭 교회 교리들을 반박하는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츠빙글리는 자기가 루터와 아무 관련도 없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부면에서 루터와 의견을 같이했으며 그 나라 전역에 루터의 소논문을 배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보다 보수적이었던 루터와는 달리, 츠빙글리는 로마 교회의 모든 흔적을—형상, 십자가상, 교직자의 제복, 심지어 전례 음악까지—없앨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렇지만, 두 종교 개혁가 사이의 더 심각한 논쟁은 성체 즉 미사(영성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예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를 고집하여, 영성체에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 안에 기적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존재하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반면에, 츠빙글리는 「주의 만찬에 관하여」(On the Lord’s Supper)라는 논문에서 예수의 말씀을 “상징적 혹은 은유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말씀은 ‘떡은 내 몸을 의미한다’ 혹은 ‘내 몸의 상징이다’는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두 종교 개혁가는 결별하였습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자기의 개혁 교리를 계속 가르쳤으며 그곳에서 많은 변화를 이룩하였습니다. 다른 도시들도 곧 그의 인도를 따랐지만, 시골 지역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보수적이어서 가톨릭교에 고착하였습니다.

 

두 분파 사이의 충돌이 너무 커져서, 마침내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교인과 로마 가톨릭교인 사이에 내란이 일어났습니다. 군목으로 복무하던 츠빙글리는 1531년, 추크 호수 근처의 카펠 전투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마침내 평화가 도래하였을 때, 각 지역은 프로테스탄트교든 가톨릭교든 그 나름의 종교를 결정할 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재세례파, 메노파, 후터파

 

그렇지만 일부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은 종교 개혁가들이 교황 중심의 가톨릭 교회의 나쁜 점들을 버리는 면에서 미흡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공동체나 국가의 모든 성원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실천하는 세례받은 신자들만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아 세례를 배척하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동료 신자들에게 은밀히 재세례를 주었으며, 그 때문에 재세례파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무기를 들거나 맹세를 하거나 공직을 맡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으며 가톨릭교인과 프로테스탄트교인으로부터 한결같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처음에 재세례파는 스위스, 독일 및 네덜란드의 여러 지역에 소규모 그룹으로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자기들의 믿음을 전파했기 때문에, 그 수가 급속히 증가했습니다. 일단의 재세례파는 종교적 열정에 휩싸인 나머지, 평화주의를 버리고 1534년에 뮌스터 시를 장악한 다음, 그곳에 공동 생활을 하는 일부다처의 새 예루살렘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이 운동은 대규모 폭력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재세례파는 나쁜 평판을 얻게 되었고, 실질적으로 말살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재세례파는 단지 속세를 떠나 조용히 생활하려고 노력하는 종교심 깊은 단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조직이 잘된 재세례파의 후예들 중에는,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가 메노 시몬스의 추종자들인 메노파와 티롤 사람 야코브 후터를 따르는 후터파가 있었습니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 그들 중 일부는 동유럽으로—폴란드, 헝가리, 심지어 러시아까지—다른 일부는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마침내 후터파와 암만파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칼뱅주의의 등장

 

스위스의 개혁 운동은 존 칼빈 곧 장 칼뱅(1509-64년)이라는 프랑스인의 지도 아래 더욱 진전되었습니다. 칼뱅은 학생 시절에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 가르침을 접하였습니다. 1534년에 칼뱅은 종교적 박해 때문에 파리를 떠나, 스위스 바젤에 정착하였습니다.

 

 칼뱅은 프로테스탄트교인을 변호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라는 책을 발행하였는데, 그 책에서 초기 교부들과 중세 신학자들의 사상 그리고 루터와 츠빙글리의 사상을 요약하였습니다. 이 저술물은 나중에 유럽과 아메리카에 설립된 모든 개혁 교회들의 교리의 기초로 간주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강요」에서, 칼뱅은 자신의 신학을 설명하였습니다. 칼뱅의 생각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만사를 결정하고 다스리시는 절대적 주권자입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죄많고 너무도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선한 행실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칼뱅의 예정론 교리인데, 그 교리에 대해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변치 않는 의도로, 누구를 구원으로 인도하고 누구를 단죄하여 멸망시킬 것인지를 단번에 온전히 결정하셨음을 우리는 단언한다.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 의도가 인간의 공로와 전혀 무관하게 그분이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에 기초를 두고 있는 한편, 그분의 단죄를 받을 사람들에게는 공의롭고 비난의 여지가 없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심판에 의해 생명의 문이 닫혀 있음을 우리는 확언한다.”

 

그 가르침의 엄격함은 다른 분야에서도 반영됩니다. 칼뱅은 그리스도인이 거룩하고 덕이 되는 생활을 하여 죄를 멀리해야 할 뿐 아니라 쾌락과 경박한 일도 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택하심을 입은 자들로 구성된 교회는 모든 세속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며,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진정으로 경건한 사회가 설립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교 강요」를 발행한 직후, 칼뱅은 프랑스 출신의 또 다른 종교 개혁가인 기욤 파렐의 권유로 제네바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칼뱅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함께 일하였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제네바를 하나님의 도성 즉 교회와 국가의 기능이 결합된 하나님의 다스림인 신권 통치의 도성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교훈과 교회 예식으로부터 공중 도덕까지, 심지어는 위생 및 화재 예방 같은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망라하는 엄격한 규칙을 벌칙과 함께 제정하였습니다. 한 역사 교본에서 알려 주는 바에 의하면, “예를 들어, 한 미용사는 신부의 머리를 단정치 못한 모양으로 꾸며 주었다는 이유로 이틀간의 구류 처분을 받았으며, 그 어머니는 여자 친구 두 명과 함께 그 일을 도왔다는 이유로 같은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춤추는 것이나 카드놀이 역시 집정관에 의해 처벌되었”습니다. 신학적으로 칼뱅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가장 크게 악명을 떨친 경우는 스페인의 미겔 세르베토 즉 미카엘 세르베투스를 화형시킨 일이었습니다

 

칼뱅은 1564년에 사망할 때까지 제네바에서 자기 특유의 종교 개혁을 계속 시행하였으며, 개혁 교회는 확고하게 설립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박해를 피해 도피한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가들이 제네바로 모여들어 칼뱅주의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각자의 고국에서 개혁 운동을 시작하는 도구 역할을 하였습니다.

 

칼뱅주의는 곧 프랑스로 퍼져 나갔는데, 위그노파(프랑스의 칼뱅주의 프로테스탄트교인을 부르는 명칭)는 거기서 가톨릭교인의 손에 극심한 박해를 당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칼뱅주의자들은 네덜란드 개혁 교회를 설립하는 데 이바지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전직 가톨릭 사제인 존 녹스의 열정적 지도 아래, 칼뱅주의 노선을 따르는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또한 칼뱅주의는 영국의 종교 개혁에서도 한몫을 하였으며, 그곳에서 청교도와 더불어 북아메리카로 건너갔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을 시작한 것은 루터였지만, 그 발전 과정에서는 칼뱅이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국의 종교 개혁

 

독일과 스위스의 개혁 운동과 아무 관련도 없는 영국의 종교 개혁은 존 위클리프의 시대까지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위클리프가 반교직자주의적 설교를 하고 성서를 강조한 일은 영국에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성서를 영어로 번역한 위클리프의 노력에 다른 사람들이 뒤따랐습니다. 윌리엄 틴들은 영국에서 도망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1526년에 신약을 발행하였습니다. 틴들은 나중에 안트베르펜(앤트워프)에서 배반당하여 기둥에서 교수형을 당했으며, 그의 시체는 불태워졌습니다.

 

마일스 커버데일이 틴들의 번역 작업을 마무리지었으며, 1535년에는 완역 성서가 등장하였습니다. 성서를 평민의 언어로 발행한 일은 의문의 여지 없이, 영국의 종교 개혁에 이바지한 가장 강력한 단일 요인이었습니다.

 

39 로마 가톨릭교와 공식 결별을 하게 된 것은, 교황이 믿음의 수호자라고 불렀던 헨리 8세(1491-1547년)가 1534년에 수장령(首長令)을 선포하고 스스로 영국 국교회의 우두머리가 된 때였습니다. 또한 헨리 8세는 수도원을 폐쇄하고 그 재산을 상류층 인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에 더하여 교회마다 영어 성서를 한 권씩 비치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취한 조치는 종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교황권으로부터의 독립, 특히 자기 결혼 문제에 있어서의 독립이었습니다. 종교적인 면에서는 이름만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가톨릭 방식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영국 국교회가 구조 면에서는 대부분 가톨릭 방식을 유지하면서 관습 면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된 것은 엘리자베스 1세의 오랜 통치 기간(1558-1603년)중의 일이었습니다. 영국 국교회는 교황에 대한 충성, 교직자의 독신제, 고해 및 그 밖의 가톨릭 관습들을 폐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주교와 주교의 교계 제도에 있어서 감독 형태의 교회 구조를 유지하였으며 수도회와 수녀회 역시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이런 보수 성향 때문에 상당한 불만이 생겼으며, 의견을 달리하는 여러 그룹이 나타났습니다. 청교도는 교회에서 로마 가톨릭교의 모든 관습을 정화하기 위한 더 철저한 개혁을 요구했으며, 분리주의자들과 독립 교회주의자들은 지방 장로들이 교회 업무를 관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다수는 네덜란드나 북아메리카로 도피하였으며, 그곳에서 그들의 조합 교회와 침례 교회를 더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영국에서는 조지 폭스(1624-91년)를 따르는 친우회(퀘이커교)와 존 웨슬리(1703-91년)를 따르는 감리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지금까지 종교 개혁의 세 가지 주된 흐름—루터교, 칼뱅주의, 성공회—을 살펴보았으므로, 우리는 멈추어 종교 개혁이 무엇을 이룩하였는가를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종교 개혁이 서구 세계 역사의 진로를 바꾸어 놓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존 F. 허스트는 그의 저서 「종교 개혁 약사」(Short History of the Reformation)에서,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져 자유와 더 높고 더 순수한 시민권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교가 확대되는 곳마다, 대중은 자기 주장을 더 강하게 하게 되었다”고 썼습니다.

 

많은 학자는, 만일 종교 개혁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서구 문명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실이 그러할지라도,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종교 개혁은 종교적인 면에서 무엇을 이룩하였습니까? 참 하나님을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에 있어서 무슨 일을 하였습니까?

 

종교 개혁이 이룩한 가장 선한 일은, 의문의 여지 없이, 평민들이 그들 자신의 언어로 성서를 볼 수 있게 했다는 점입니다. 처음으로, 평민들이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앞에 놓고 읽음으로써, 영적 자양분을 섭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성서를 읽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물론 필요합니다. 종교 개혁은 교황권으로부터의 해방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여러 세기 동안 속박되었던 그릇된 교리와 교의들로부터의 해방도 가져왔습니까?—요한 8:32.

 

거의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똑같은 신경들—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오스 신경, 사도 신경—의 내용에 동의하며, 삼위일체·영혼불멸·지옥불 등 가톨릭교가 여러 세기 동안 가르쳤던 바로 그 교리들의 일부를 믿는다고 공언합니다.

 

그런 비성경적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에 대해 왜곡된 견해를 갖게 하였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자유 정신의 결과로 존재하게 된 수많은 분파와 교파들은 사람들이 참 하나님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사람들을 여러 방향으로 갈라지게 했을 뿐입니다.

 

실제로 그 다양성과 혼란 때문에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까지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19세기에 들어서 무신론과 불가지론의 물결이 일게 되었습니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8-07-12 12:41:59 제2종교혁명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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